맞거나 틀린 선택은 없다. 내가 한 선택이 옳았다는 걸 증명하는 과정 뿐
입사한지 3주차가 된 지금도 나에게는 달리 할 일이 없다. 그래서 요즘은 혼자서 어깨너머로 들려오는 단어들을 검색해 정리해놓고 있다. M&A 관련된 용어가 많이 들려오는 걸 보니 그런 걸 하고있는 모양이다.
3주차 초반에는 감옥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. 9시에 출근해서 6시까지 버티고 앉아있어야 하는데 블로그에 글을 쓰지도 못하고, 휴대폰을 자주 봐서도 안 된다. 그게 너무 답답해서 퇴사할까 진지하게 고민한 순간이 한두번이 아니다. 그런 나의 생활이 무의식적으로 매우 불만족스러웠는지, 나는 부쩍 퇴사 핑계를 만들어내기 위해 파견직에 대한 평판을 검색해보기 시작했다. 첫 직장이 파견직이면 평생 파견만 돈다는 말도 있고, 파견직은 경력으로 쳐 주지 않는다며 나이만 들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말 등등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. 나만 해도 주변 사람 누구도 정규직을 내치고 파견직을 선택한 것에 대해 지지해 준 사람이 없다.
하지만 내가 만약 다른 기업에 정규직으로 들어갔었다면? 아니면 독서실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고 있었다면? 그랬다면 몰랐을 세상을 나는 경험하고 있다. 정말로 내 이 한 몸이 미래를 불러오는 일에 일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경험이 진짜 짜릿하다. 우리 기업, 특히 우리 부서의 특징 때문에 파견직으로 들어온 나도 이런 신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건 일단 특이한 케이스이고, 그렇기 때문에 내가 느끼는 이 자리와 남들이 보는 이 자리의 괴리가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.
밖에서 보기엔 아무리 대기업이라 해도 파견직이라 소속감도 없을 것이고, 차별도 심할 것이고, 하는 일도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기 때문에 보잘 것 없는 자리로 보이겠지만, 그 안에서 (개인적으로)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는 내가 느끼는 이 자리는 온갖 이득이 가득한 자리다.
일단 다른 직원들처럼 24시간을 일에 몸담고 성과에 신경쓰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, 다른 직원들처럼 복잡한 채용 절차를 거치느라 오랜 시간 준비를 할 필요가 없었단 점,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은 애초에 시키지 않기 때문에 일이 잘못될까 걱정하지 않고 내가 해야 할 일을 병행할 수 있다는 점! 그러면서도 여러 사람들이 모여 뭔가를 만들어내고 미래를 끌어 당기는 일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점은 진심으로 돈 내고도 할만 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. 게다가 나 개인적으로는 지금 이 경험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을지, 나무 꼭대기에 서서 조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.
그러면서도 다른 길로 갔다면 얻을 수 있었을 다른 황금같은 경험은 어땠을까, 자꾸 돌아보게 되기도 하다. 정규직으로 들어갔다면 남들이 보기에도 차곡히 경력을 쌓는 것으로 보이는 건 물론이고 매우 전문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었을 것이고, 그걸 바탕으로 지금 이 회사의 직원들이 하고 있는 일에 합류하는 것이 좋았으려나? 하는.. 하지만 자꾸 돌아본다고 좋을 점이 있으려나, 그 에너지를 내 앞길 갈고 닦는 데에 쓰는 게 현실적으로 이득이겠지..
그래도 남들이 하는 말에 하염없이 휘둘리는 내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나는 목적을 가지고 지금 이 선택을 했다는 사실이다. 내가 이 선택을 한 이유를 떠올리며 이 방향이 옳은 방향이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계속 선택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.
내가 가진 모든 건 장점
3주 째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9시부터 6시까지 앉아있어야 하는 생활 패턴에 적응이 되었다.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, 새삼스럽게 인간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. (아, 어쩌면 2주차때 느낀 깨달음으로 밥을 꼬박꼬박 잘 챙겨먹은 탓에 퇴근 후에도 뭔가를 할 여력이 남아 지옥같던 생활이 좀 쉽게 느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. 정말, 밥을 꼬박꼬박 챙겨먹는 것은 매우 매우 중요하다!) 어쨌든 이젠 퇴근 후에도 다른 무언가를 할 여력이 남아있고, 그 흐름을 틈타 나는 학원에 등록했다. 드디어 내가 파견사원이라는 점이 이득으로 돌아서는 분기점을 맞닥뜨리기 시작한 것이다.
사실 나는 세상은 가치중립적이라고 생각해서, 극단적인 사례만 아니라면 거의 모든 특징이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.
예를 들어 누군가가 백수라면, 그건 대부분이 보기에 부정적이기 때문에 단점이라고 생각할 테지만, 사실 백수로서(휴학생 백수?) 꽤 오랜 기간을 살아본 나로서는 백수여야만 할 수 있는 경험,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것들을 알게 됐다. 지금 기억나는 것 하나는 사람은 맨날 돈만 쓰면서 놀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순간이다. 내가 아무 것에도 기여하지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 세상이 얼마나 공허하게 느껴졌던지.. 그래서 그 이후로 나는 일은 꼭 하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. 마르크스의 생각이 어디서 나온 생각인지 발톱만큼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. 내가 백수였기 때문에!
관점을 달리 해 보면 내가 가진 모든 특징이 장점이 될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, 내가 백수였기 때문에 노동을 단순한 밥벌이 이상으로 생각하게 된 것도 그렇고, 내가 가난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밖에 없었단 것도 그렇고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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